다산의 정치개혁론 탕론(湯論)…끌어내린 것도 대중(大衆)이고, 올려놓고 존대한 것도 대중이다.

  • 다산 정약용은 유학자로 누구보다 조선의 개혁을 주장한 정치가이자 개혁가였다.

    이러한 사상은 그의 글을 통해서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다. 근본이 유학자인 다산을 생각할 때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개혁적이었다. 더군다나 성리학에 기반한 당시 조선의 정치 체제를 생각해보면 정면으로 부정하는 반체제적이고 혁명적인 글을  썻다는 것은 그만큼 조선사회가 피폐해져 개혁이 절실했다고 할 수 있다.

    다산은 「원목(原牧)」에서 “위정자(牧)가 민(民)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民이 위정자(牧)를 위해 사는가" 라는 문제를 제기한 후, “위정자는 백성을 위해서만 있는 것이다”라고 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또, 「탕 론(湯論)」은 「원목(原史)」의  핵심인 주권재민적 정치관에 기초해서 민(民)이 주체가 되어 위정자를 상향식으로 추대하는 아래로부터 위로(下而上) 즉, 하이상의 정치 원리를 제시하였다. 

    또한 위정자를 세운 주체가 민(民)이므로 위정자가 잘못하여 국론을 분열시키고, 백성의 화합을 이룩해내지 못할 때는 언제라도 백성들이 뜻을 모아 갈아치울 수 있다는 정치사상이 담겨 있다.

    탕 론(湯論)」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천자(天子)의 지위는 어떻게 해서 소유한 것인가. 하늘에서 떨어져 천자가 된 것인가, 아니면 땅에서 솟아나 천자가 된 것인가. 생겨진 근원을 살펴보면 다섯 가구(家)가 한 이웃(1隣)이 되고, 다섯 가구에서 장(長)으로 추대한 사람이 인장(隣長)이 된다. 다섯 이웃 (5隣)이 1개 동리(1里)가 되고, 다섯 동리에서 장으로 추대된 사람이 이장(里長)이 된다. 

    또 다섯 개 마을(5鄙)이 1현(縣)이고, 다섯 개 마을에서 장으로 추대된 사람이 현장(縣長)이 된다. 또 여러 현장들이 다같이 추대한 사람이 제후(諸侯)가 되고, 제후들이 다같이 추대한 사람이 천자(天子)가 되는바, 천자는 여러 사람이 추대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대저 여러 사람이 추대해서 만들어진 것은 또한 여러 사람이 추대하지 않으면 물러나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다섯 가구가 합의하지 못하게 되면 다섯 가구가 의논하여 인장을 바꿀(改定) 수가 있고, 다섯 개 이웃이 합의하지 못하면 25개 가구가 의논하여 이장을 바꿀 수가 있고, 구후(九侯)와 팔백(八伯)이 합의하지 못하면 구후와 팔백이 의논하여  천자를 바꿀 수가 있다. 구후와 팔백이 천자를 바꾸는 것은 다섯 가구가 인장을 개정하고 25가구가 이장을 개정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누가 신하가 임금을 쳤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중략)

    뜰에서 춤추는 사람이 64인인데, 이 가운데서 1인을 선발하여 상례도구인 우보(羽葆)를 잡고 맨 앞에 서서 춤추는 사람들을 지휘하게 한다. 우보를 잡고 지휘하는 자의 지휘가 템포에 잘 맞으면 모두들 존대하여 ‘우리 무사(舞師)님’ 하지만, 지휘가 템포에 잘 맞지 않으면 모두들 그를 끌어내려 다시 이전으로 복귀시키고 유능한 지휘자를 재선(再選)하여 올려놓고 ‘우리 무사님’ 하고 존대한다. 끌어내린 것도 대중(大衆)이고 올려놓고 존대한 것도 대중이다. 대저 올려놓고 존대하다가 다른 사람을 올려 교체시켰다고 교체시킨 사람을 탓한다면, 이것이 어찌 도리에 맞는 일이겠는가.”

    이처럼 다산 정약용은 비교적 젊은 시절 「원목(牧)」, 「전론(田論)」, 「탕론(湯論)」등을 통해서 시대를 뛰어넘은 정치경제사상의 혁명적 개혁을 통해 나라다운 나라 백성이 주인되는 세상을 꿈꾸었다. 

    바야흐로 200여년이 흘렀다. 백성과 목민자의 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게 하나도 없다. 피폐한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무엇보다 목민관은 백성을 위한 존재로서 민생현장을 제대로 보살피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하였다. 그렇치 못할 경우 끌어내려 잘 하는 사람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역성이 아니라 순리라고 하였다.

    지금은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불확실한 시대이다. 이 나라와 이 백성들의 미래를 책임지고 일하는 지도자들은 물론 공직자 모두가 과연 자신이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가  성찰하면서 200여년 전 다산이 주창한 탕론을 다사한번 되새겨보길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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