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삶속에서 다양한 이견이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이견에 대하여 무조건 틀린 것이라며 원망을 할 때는 서로의 소통은 물론 상대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게 되고 급기야는 남남이 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원망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생각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다산(茶山)의 가르침이야말로 현실에 분노하며 아파하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원망이란 상대의 입장을 이해한 나머지 성인으로서도 인정한 사실이고, 충신(忠臣)ㆍ효자(孝子)의 입장에서는 자기 충정을 나타내는 길이다.
그러므로 원망을 설명할 수 있는 자라야 비로소 시(詩)를 말할 수 있고, 원망에 대한 의의를 아는 자라야 비로소 충효에 대한 감정을 설명할 수 있다. 가령 화재(貨財)를 좋아하고 제 처자(妻子)만 사랑하여 규방(閨房) 안에서 비난을 일삼는 자이거나, 또는 재능도 없고 덕도 없어서 청명(淸明)한 세상에 버림받고 조잘조잘 웃사람 헐뜯기나 좋아하는 자이면 그것은 패란(悖亂)을 일삼는 일이니 거론할 필요나 있겠는가.”
- 여유당전서 제1집 제10권 원원(原怨)
다산은 여유당전서 원원(原怨)이 글을 통해 ‘원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원망’은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또 자기의 충정(忠情)을 나타내는 길이라고 하였다. 다산은 무엇보다 민생현장에서의 '원망'이야말로 현실을 타게할 수 있는 힘으로 세상을 움직여 나아갈 수 있다고 하였다. 다산은 누구보다 ‘원망’의 작용을 긍정적으로 인식하였다. ‘다산학 공부’에서 다산의 ‘원망함’에 대한 여러 가지 의미 해석을 바탕으로 다산의 ‘원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시대를 아파하는 문학’으로 『시경』을 읽고 시를 창작했던 다산은, 원망해야 할 때 제대로 원망하지 못하는 것을 문제점으로 지적하였다. 다산은 백성들의 입장에서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보다 나은 사회를 모색하고자 하는 문학의 사회 참여 의식이 누구보다 높았다.
다산이 강조한 ’원망‘의 정서는 결코 사사로운 감정으로 말미암은 원망이나 자신의 능력은 생각지 않고 더 많이 바라다가 얻지 못해서 생긴 원망이 아니다. 또 별생각 없이 윗사람을 헐뜯는 원망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었다.
다산이 인정하는 ‘원망'이란, 정성과 마음을 다하고 상황을 깊이 성찰한 다음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직면할 때 발현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충동적인 원망이나 자신의 사사로운 이기심에서 비롯한 '원망'이 아닌, 깊은 성찰과 최선을 다한 후에 발현되는 '원망'인 까닭에 그 원망이 긍정적이고 사회적으로 말이 격렬하면서도 절실한 온유함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타인과 사회에 대한 편견, 그리고 무관심이 팽배하여 자신의 감정 조절과 통제가 점점 어려운 사회에 살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다산의 ‘원망’에 대한 긍적적인 인식을 강조한 점은 마치 오늘의 상황을 예견이나 한 것 같다. 다산은 지적 성찰과 심신의 노력을 동반한 건강한 ‘원망’의 목소리가 충동적이고 지각없는 ‘원망’과 구분되어야 함을 명쾌하게 지적하였다.
이러한 바탕위에 다산은 우리가 따뜻한 감성으로 서로 소통하고 불의에 정의롭게 분노할 수 있음을 환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진정한 원망의 목소리들이 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보았다.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로 인하여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원망하고 있다. 지금의 원망은 지적 성찰과 심신의 노력을 동반한 건강한 '원망'의 목소리라기보다 충동적이고 지각없는 ‘원망’이 되어 서로의 상처가 되고 급기야는 편 가르기가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여 년 전 원원(原怨)을 통해 “원망(怨望)은 충정(忠情)을 나타내는 길이다”라고 한 다산의 외침이 우리의 소중한 가르침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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