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 백서사건 현장 - 제천 배론성지 황사영 토굴을 가다! -

  • 艸石 진규동 박사 / 다산미래원 원장



  • 18세기 조선은 유교의 폐단으로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신앙의 갈등 현상이 팽배하고, 사상적 다원화 현상이 점증되고 있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개혁의 욕구가 강하게 솟구치던 때였다. 

    바로 이 무렵 천주교는 부패한 세상을 척결하고 새로운 세상을 구현하고자 하는 신진세력과 민생의 새로운 사상적 등불이 되었다. 그러나 조정의 끝없는 당파싸움은 다양한 학문적 사상을 폭넓게 수용하기 보다는 천주교를 정치적 탄압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이런 와중에 1800년 정조의 죽음으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정조가 죽자 정계의 주도세력은 노론 벽파(僻派)로 바뀌었고, 이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부터 1866년  병인박해까지 75년 동안 1만여 명의 천주교 지도자와 교인이 죽임을 당했다.

    이런 과정 중에 1801년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였다. 황사영(1775년∼1801년)은 선비  출신의 천주교 신자로. 자는 덕소(德紹)이고, 세례명은 알렉산드르(Alexandre)이다. 그는 16세에 다산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정난주와 혼인하면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는 정약종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으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1795년에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만나  그의 측근으로 활동하였고, 1798년에는 한양으로 이사한 후 천주교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황사영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박해를 피해 충청도 제천의 배론 마을 토굴 속에서 8개월 동안 피신하였다. 그는 이곳 토굴에서 중국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에서의 천주교 박해 현황을 고발하며 그에 대한 방안을 제시한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가 쓴 편지가 중국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발각되었다. 그것이 바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이 사건의 결과는 편지 심부름을 맡았던 황심 토마스가 그 해 9월 15일 배론에서 체포되어 10월 24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고, 황사영은 황심이 체포된 후 9월 29일 배론에서 체포되어 1801년 11월 5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대역부도의 죄로 능지처참 당하였다. 

    그리고 황사영의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아내 정난주는 제주도로, 두 살 된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로 귀양을 보냈다. 

     

    황사영 백서는 가로 62cm, 세로 40cm의 명주천에 쓴 것으로 글자 수는 122행, 13,384자다. 깨알 같이 작은 글자 1만 3천여 자로 천주교 박해를 고발하는 글이었다. 이 백서는 천주교  박해 상황을 열거하면서 관련 인물들의 행적을 적었다.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최필공,   권철신, 이가환, 이승훈, 정약종, 이벽, 강완숙, 송마리아 등은 신앙과 순교 행적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었고, 정약용, 권일신, 원경도, 이안정 등에 대해서도 간략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이외에도 백서에는 당시의 사회상과 천주교 확산에 대한 각종 사실이 쓰여 있다. 또 천주교회의 재건을 위한 다섯 가지 제안도 기록되어있다. 우선은 국제적인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향후 교회의 운영 방안을 설명하면서 서양 여러 나라에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였다. 

    둘째로 북경 교회와의 연락 방안을 제시하였다. 조선인을 북경 교회에 보내 그곳의 나이 어린 신학생에게 조선의 말을 가르쳐 후일을 대비하자고 했다. 셋째는 교황에게 청하여 중국 황제로 하여금 조선에서 천주교를 공인하도록 권고하였다. 넷째는 조선을 청에 복속시키자는 제안이었다. 

    이렇게 되면 중국과 조선이 서로 통하여 신부의 왕래와 조선인의 세례가 수월해질 것이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다섯째는 서양의 무력을 동원하여 조선을 협박하자는 것이다. 수백 척의 배에 정예 군사 5∼6만 명과 대포 등을 싣고 와서 조선 정부와 천주교 수용을 의논하라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문제의 핵심으로 비록 당시 조선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극복하기 위한 목숨을 건 편지였지만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국가전복 세력으로 탄압하였다. 이 결과 황사영은 대역부도의 죄로 능지처참 당하였다. 이후 황사영의 백서 사건은 조선에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질 때마다 거론되었다. 

    더욱이 백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천주교인 전체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졌고, 천주교인들은 서양세력을 통해 국가를 전복하려는 집단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2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황사영은 천주교의 위대한 성도로 2021년 6월 10일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는 시복 133위에 그를 포함시켜 예비심사 문서가 교황청 시성성에 제출되어 신앙의 모범을 살다 순교한 ‘복자(福者)’로서의 교황청 선언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 

     

    200여 년 전 천주교에 대한 위대한 신앙심의 발로에서 일어난 황사영 백서 사건은 오늘날 한국 천주교의 또 하나의 역사적 위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현재 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로마 교황청 바티칸 민속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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