꿔다놓은 보릿자루를 위한 변명

  • 박한솔 강진군청 해양산림과



  • 조선시대 연산군이 폭정을 일삼자 몇몇 신하들이 박원종의 집에 모여 거사를 모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이가 약속된 인원보다 한 사람이 더 있지 않느냐며 지적을 했다. 당시 촛불도 켜지 않고 있어서 염탐꾼인 줄 알고 모두가 놀랐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구석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였다. 그 보릿자루에 누군가 갓과 도포를 벗어서 올려놓은 것을 사람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오늘날 이 ‘꿔다놓은 보릿자루’라는 말은 여럿이 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자신의 위치에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 사용하곤 한다. 강진군은 올해 48명의 신규 공무원을 임용했다. 

    공무원의 상징인 임용장과 배지를 받고 공무원 선서를 외며 마치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는 느낌이 들었을 터다. 그러나 막상 출근을 하면 소위 말하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고 만다. 처음 맡는 업무에 대한 두려움과 익숙지 않은 시스템이 주는 불안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냥 열심히 하면 되어야. 인사 잘하고, 잉?”

    혹시나 하고 관련 업무를 했었던 지인에게 물어보지만 크게 도움이 되진 않는다. 그래서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들이 모인 사이버 공간으로 향한다. 그리고 자신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일시에 목격하게 된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면 대개 타인의 행동을 따라서 하는 경향이 짙다. 조금이라도 먼저 경험해본 동기들의 말 한 마디에 신규 공무원들은 일희일우하며 서둘러 뒤를 쫓는다. 

    유의미한 노력일지, 무의미한 발버둥일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난해 8월, 행정안전부에서 전국 공무원 3,6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20~30대 공무원의 10명 중 9명이 우리 회사에 경직된 사고와 권위적 태도를 보이는 상관 등을 지칭하는 속칭 ‘꼰대’가 있다고 답했다. 꼰대의 실존 여부는 개개마다 달라 확인이 어려우나 현실의 인식이 다소 치우쳐져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아마도 이 꼰대들의 사회에서는 척하면 척하고 알아듣는 능력을 신규에게 필수적으로 요구할 것이다. 물론 앞선 상황도 그들에게는 못마땅해 보일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90년대생이 온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세상에서 이제 이러한 생각은 지극히 구시대의 관점이다. 뽕나무밭은 이제 푸른 바다가 되었다. 달라져야 할 때다. 그리고 이럴 때 불현듯 생각나는 것이 있다.       

    청자에는 흔히들 기다림의 미학이 담겨있다고 한다. 청자의 바탕이 되는 흙을 만드는 과정부터 길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먼저 원재료인 고령토에 부족한 성분을 혼합해 물에 푼 다음 채에 걸러 불순물을 제거한다. 이 순서를 거치면 흙의 입자가 곱고 균일하게 된다. 물론 여기가 끝은 아니다. 표면이 하얗게 될 정도로 잘 말린 후 점성을 높이기 위해 흙을 이겨야 한다. 그러고 나서 본격적인 성형에 들어간다. 굽는 과정 또한 예사롭지 않다. 약 800도 가량의 열을 가해 대략 30시간 동안 불을 지펴 구워내며, 유약을 바르고 나서 1300도 정도의 온도에서 한 번 더 굽는다. 이렇듯 많은 과정을 거쳐야 청자가 만들어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불순물을 거르고 경험이 점성을 더한다. 그리하여 잘 구워지면 청자처럼 맑은 비색을 선연히 내비칠 것이다. 그러니 꿔다놓은 보릿자루에도 기다림의 미학이 담기길 기대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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