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 함께 잇-다’특별전 개최를 준비하며

  • 권동식 다산박물관 전시기획팀장



  • 올해로 현재의 다산초당을 재건하기 위해 강진 도암 출신인 송령 윤재은 선생님을 필두로 만들어진 ‘정다산유적보존회’가 결성한 지 어언 65주년이 되었다. 각계각층이 참여한 이 조직은 다산초당 재건에 힘써 오늘의 초당이 있기까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를 기념하고자 다산박물관에서는 ‘다산초당, 함께 잇-다’특별전 개최를 오는 ‘21. 10. 22. ~ ‘22. 2. 27.까지 열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다산초당은 모두 잘 알려진 것과 같이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으로 유배와 사의재를 비롯하여 보은산방, 이학래 집을 거치면서 8년, 다산초당에서 10여 년을 기거한 후 해배되어 고향인 남양주로 돌아갔다.

    다산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다산초당은 원래 귤동처사 윤단(尹慱 1744-1821)의 산정(山亭) 유운각(蕤芸閣)이었다. 다산은 외척이었던 윤단을 따라 놀러 왔다가 이곳이 너무 맘에 들어 1808년 봄부터 이곳에 정착하였다. 다산은 연못을 넓히고 도암면 바닷가 농어바위 근처에서 돌을 날라와 연지석가산을 만들었으며, 초당 우측에서 약천을 파 그 우물물을 길어 마당 다조에서 차를 달여 마시며 심신을 달랬다. 뒤편 바위에는 정석이란 글자를 새겨 넣고 마음을 바로잡았었다. 이렇게 연지석가산, 약천, 다조, 정석을 시로 엮어 ‘다산사경첩’이 되었고, 보물 제1683-1호로 지정되었다.

    다산은 이곳에서 종교를 떠나 문산 이재의, 아암 혜장 등과 두루 교류하였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함께 만들었던 그 유명한 1표2서를 포함해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집대성한 지식의 보물창고이기도 한 장소였다.

    하지만, 초당은 다산이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 제자들에 의해 관리되다 차츰차츰 이곳에서 머물던 사람들도 모두 떠나고, 으레 그렇듯이 빈집으로 있다 폐가가 되었다. 

    1895년 경 정석의 바위만 남긴 채 무너져 60여 년을 방치되어오던 이곳을 재건한 것은 바로 그 다산의 제자 후손들과 강진 사람들이었다. 이에 대한 기록은 1958년 5월 작성된 ‘정다산유적보존회 사업추진보고서’에 일자별로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1955년 8월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장 이혁(李赫)교수를 위시하여 이을호(李乙浩), 변극, 양상하, 최문헌 교수가 강진 귤동에 있는 정다산유적 조사차 방문하여 윤재은 선생께 초당 재건 추진을 강조하고 재건을 위해 YMCA에 금일봉을 기증하였다. 이후 계림동 경양방죽에서 이혁 학장은 송령 윤재은 선생에게 우리나라 문화발전을 위하여 다산초당 재건사업 추진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이때 큰 결심을 하게 된다 이듬해 1956년 8월 강진읍 차종채, 유재의 두 분이 솔선하여 특별회원으로 각 금 200,000환(현재 약 1천만 원/한국은행 금 기준)씩의 의연금을 기부하면서 이 의연금을 기본으로 발기(결성) 준비에 착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발기준비 과정에는 강진도립병원 김창식, 최태근, 이호정, 윤영선, 양병일씨 등이 발기인 모집에 참여하고, 강진 유지와 광주 유지가 합동 발기할 것을 합의한다.

    1956년 10월, 드디어 이을호 교수의 발기 취지서가 작성되었고 ‘정다산유적보존회’ 회칙이 만들어졌으며, 각자의 임무가 부여되기도 하였다. 1957년 1월 광주 발기인대회가 개최되었다. 회원모집 및 자금 마련을 위해 노력한 흔적은 차마 글로써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시대 상황이 한국전쟁이 휴전된 지 겨우 3년이 지난 시기였다. 산림이 황폐되어 벌채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 목재를 운반하는 과정은 인근 마을 주민 대부분이 참여한 큰 축제에 가까운 행사였다. 귤동을 시작으로 덕산, 보동, 마점, 율포, 표장마을 주민들이 돌아가면서 출역하였다. 연인원 200명이 동원된 대규모 출역으로 기록되었다. 

    초당 건립의 총 감독인 도편수는 장흥출신 이수길이였으며, 건축계약 체결이후 기와 주문, 공사 중에 도편수 4남 목수의 사망으로 50일간 공사를 하지 못한 사건, 자금 부족으로 공사가 지연된 일도 있었다. 상량식 택일은 구례군 정태순씨에 의뢰하였고, 상량문은 경남 합천 출신인 보성군에 거주하는 김문옥 선생님께서 작성하였다. 상량식에는 전남도지사를 비롯한 다양한 축전이 있어 그 자리를 빛냈다. 우여곡절 끝에 1958. 4. 25. 드디어 현재의 다산초당이 준공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57년 4월 문교부장관에 고적 지정 신청원을 제출하였고, 같은 해 11월 현장 조사 후 1959. 1. 23. 고적 제153 호 ‘정다산유적’으로 지정 고시되었다가 1960. 1. 21. 사적 제107호 ‘정다산유적’으로 변경되었다. 이번 특별전은 다산초당 재건에 중점을 두고 진행하고 있다. 누군가는 해야 했고, 어려운 시기였지만, 앞에 나서서 힘써준 윤재은 선생을 비롯한 발기인 66명의 노력은 현재의 다산초당이 있기까지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함께 다산의 뜻을 잇기 위해 힘을 모아준 도암면민들, 그리고 어려운 시기에 찬조금을 기꺼이 내준 군민들의 있었기에 1958년 5월에 470만 환(현재 약 277백만 원/한국은행 금 기준)이라는 거금이 모금(국비, 도비, 군비 보조 포함)되어 현재 모습으로 재건할 수 있었다. 오늘도 다산초당은 우리와 함께 만덕산 품 안에서 의연히 강진만을 바라보고 우뚝 서 있다. 이번을 계기로 다산초당을 다시 한 번 돌아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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