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

  • 김수현 강진군도서관



  • 이불을 잡아당기는 아침, 바람 끝이 매섭다. 어느덧 가을이다. 코로나 19로 인류가 고통 속에서 지쳐 가는데 자연(自然)은 스스로 그러할 뿐, 거스르지 않고 순행한다. 민들레는 민들레대로, 개미는 개미대로 살아간다. 이러니저러니 말이 없다. 그러니 인간도 본성대로 살아갈 것이다. 힘을 모아 이 시기도 이겨낼 것이다. 

    흔히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한다. 한 해 농사를 마쳐 먹거리가 풍성한 가을은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기에 공부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기도 하고, 가을의 넉넉함 덕분에 마음을 쌀 찌울 수 있는 여건도 만들어지기 때문에 독서의 계절로 자리매김했다는 설(說)도 있다. 여기에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천고마비의 쾌적한 날씨와 쓸쓸하고 외로운 가을 감성 또한 책 읽기 좋은 조건을 만들어준다고 한다. 

    책 읽기 좋은 계절, 오히려 나는 생각이 잡념으로 이어질 뿐 진전이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여러 번 책 읽기 계획을 세우지만 언제나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러다 차라리 한 줄 글을 읽는 것이 실행으로 끄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용감하게 책을 집어 들었다. 김 훈의 『칼의 노래』다. 펼치니 지면이 눌눌하다. 오랜 책에서 맡아지는 냄새가 아찔할 정도로 향긋하다. 끝까지 읽어낼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틈을 내어 한 장 한 장 읽었다. 살갗의 단면을 드러내는 문장들이 이어졌다. 단문의 호흡은 날카로웠으며, 장문의 호흡은 곡진하고 부드러웠다. 이순신의 삶은 치열하고 고독했다. 책 속의 그의 읊조림과 고백이 내내 슬펐다. 마침내 나는 이순신이 되었다. 힘이 들어 간간이 책을 덮어야 했다. 

    작품 안에서 떠도는 냄새는 노골적이었다. 작가는 삶을 냄새로 표현하고 있구나 싶었다. 잊을 수 없는 냄새였다. 여진의 가랑이에서 올라오는 젓국 냄새, 면의 푸른 똥, 덜 삭은 젖 냄새, 어머니의 아득한 오래된 아궁이 냄새, 마음속 화약 냄새까지. 몹시 강렬했다.

     “나라의 칼로 백성을 지키지 못할진대 나라의 칼로 다 죽여주시오.”

    늙은 어부의 일갈이 귓전을 파고든다. 횃불같이 일어나 으깨져서 사라져간 숱한 의병, 승병, 백성들. 읽는 내내 멍멍했다. 아, 나라면 어떻게 살았을까? 마침내 책장을 덮는다. 그래도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의 독서는 참으로 민망한 수준이다. 더군다나 책의 숲속에서 사는데 말이다. 나름 전략을 짰다. 한 권을 읽더라도 깊이 읽자고. 천천히 읽고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장을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었다. 다시 이순신이 되었다. 민망하지 않았다. 다음 책을 고르고 있다. 책의 향기가 삶의 향기를 더해줌을 알았기 때문이다.

    출근하는 길은 새로울 것이 없다지만 하루하루가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 시멘트 속을 비집고 살아가는 잡초, 담을 둘러싼 나무들, 호흡을 타고 들어오는 공기, 간간이 개 짖는 소리,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 드디어 도서관에 도착했다. 도서관 마당에는 민들레가 있다. 땅에도 공중에도. 땅에는 식물 민들레 꽃씨가, 그 위에는 인공 민들레 꽃씨가 반짝거린다. 군민의 밤길을 밝혀줄 민들레 등불이다. 가을, 책 냄새 가득한 도서관으로 놀러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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