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벌써 20년여 전 일이다.
“아야, 친구 생각나서 너라도 보고 갈라고 왔다”. 나이 지긋한 분이 취기 있는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어디서 뵌 분이긴 한데 미처 기억해내기도 전에 다그치듯 묻는다. “나 느그 아부지 친군디 몰겄냐, 이놈아, 너 영갑이 아니냐?” 아차, 완도 약산에 사시는 아버님 친구였다. ‘아니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잘 알죠, 근데 어쩐 일로 여기까지…’ 라고 얼버무렸던 기억이 새롭다.
친구인 내 선친이 보고 싶어 그의 아들이라도 보고 가야겠다고 술 한 잔 드시고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까지 찾아오신 것이다. 그분은 완도 약산에서 어장을 하고 있는 아버님과 강진농고(現생명과학고)동창이다. 지금은 마량고금 연륙교가 생겨 교통이 좋아졌지만 이전에는 약산, 고금도는 마량에서 철부선을 이용해 다니는 섬이었다.
강진에 왔다가 배가 뜨지 못하는 날이면 간혹 우리 집에서 주무시고 가기도 하고 배 시간을 맞춰 놀다가기도 하셨다. 그때마다 어머님은 시골살림에 반찬거리도 없는데 불쑥 찾아온 손님맞이에 어쩔 줄 몰라 하셨지만 두 분은 이에 아랑곳 않고 밤을 지새우며 술잔을 기울이던 모습으로 보아 절친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중 1~2학년 여름방학 때의 일이다. 배 건조를 위해 우리 동네에서 삼나무 벌목을 해 가시던 아버님 친구가 광주서 학교 다니는 우리 애들도 내려와 있으니 함께 가자며 나를 약산으로 데리고 갔다. 삼나무를 가득 싣고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것 같은 두려움으로 생전처음 배를 탄 것이다. 그분의 집은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있었다. 방학이라 내려와 있다는 아들들을 소개하며 형 동생으로 지내라 하셨는데 나보다 위인 형과 동갑또래가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나의 선친은 66세, 어머님은 그보다 8년 전인 56세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어머님이 보고 싶으면 이모 찾아가고 아버지가 보고 싶으면 아버지 친구를 찾아뵌다는 말이 있다. 고금대교가 이어진 후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세 번이나 그 분을 찾아 나섰지만 만나질 못했다. 약산면 바닷가 마을 언덕배기에 집이 있고, 아버지 또래 나이에 아들이 조대공대에 다닌다고 했던 기억이 전부였으니… 10여 년 전 세 번째 찾아가 어느 가게에서 물으니 아마도 완도로 이사가 운수업을 하시는 분 같다고 해 수소문했으나 불순한 목적으로 사람을 찾는 걸로 오해하기도 해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2021년 새아침, 흩날린 눈에 어설프게 뒤덮힌 부모님 산소를 다녀오며 불현듯 그 분이 생각나 연휴임에도 불구하고 지인인 완도군청 A국장에게 전화를 했다. 제 아버님 절친을 찾고 싶다며 큰 기대를 않고 어렴풋한 기억만을 전달했다.
연휴가 끝나자마자 연락이 왔다. 제가 말하는 내용과 일치하지는 않는데 그분 아들이 맞는 것 같으니 통화를 해보라며 연락처를 알려줬다. 전화를 하니 그분의 큰 아들이었다. 아버님이 생존해 계신다는 반가운 소식도 잠시 지금 요양병원에 계신다는 소리에 가슴이 멍했다.
나와 동갑인 동생은 몇 해 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함께 들려줬다. 아버님은 고향을 떠난 적이 없고 자기는 광주에서 사업을 하며 수시로 마량을 거쳐 고향에 다닌다고 했다. 그 아드님은 내가 알고 있는 지인 상당수와 교분을 쌓고 있기도 했다.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좀 더 적극적으로 찾아보는 노력을 하지 않은 죄송함에 죄인이 된 느낌이었다.
다행히 고향 가까운 요양병원에 계시고 대화나 소통은 가능하다니 당장이라도 찾아뵙고 싶지만 코로나19가 가로막는다. 아드님에게 예전의 건강을 되찾았으면 좋겠다는 소망과 담아 제 편지를 아버님께 보여 달라며 장문의 글을 보냈다. 머잖아 코로나19가 진정되어 찾아뵈었을 때 “아버님 저 알아보시겠어요?”라고 여쭈면 “아야, 이놈아 왜 내가 너를 몰겄냐, 덕천 학현이 아들 영갑이 아니냐”며 호탕하게 웃으며 반겨줄 것 같은 기대와 설레임으로 또 하루를 보낸다.